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모 데우스 (문단 편집) ==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 '''4장 ‘스토리텔러'''' 4장에서는 상호주관적 실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에서 작동하는지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설명한다. 먼저 고대 수메르인들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호주관적 실재인 신화를 통해 집단이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고대의 신들을 현대의 기업과 비유하는데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재산(토지)을 소유하고 직원(성직자)을 고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한다. 죽지 않는 신은 점점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더 많은 성직자들을 고용하여 결과적으로 복잡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의 문명은 일정 규모 이상 확대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문자와 돈이 발명되기 전에는 복잡한 행정문제를 모두 사람의 두뇌로 처리해야 했고 개인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인류가 문자와 돈을 발명한 이후에야 거대한 왕국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사회는 수많은 서류로 구성된 거대한 알고리즘이 되었다고 한다. 문자사회에서 각 개인들은 알고리즘의 한 단계일 뿐이며 대부분의 결정은 알고리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문자로 인해 인간의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허구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현실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가 도리어 현실을 고쳐쓰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저자는 4장 마지막에서 상호주관적 실재들의 힘은 강력하지만 허구와 실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돈, 국가, 기업과 같은 허구적 실체는 인간사회가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지만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표나 평가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흔히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그런데 국가는 우리의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가는 우리를 돕기 위해 발명한 도구인데 왜 그 도구를 위해 생명을 희생해야 하냐고 질문한다. '''5장 ‘뜻밖의 한 쌍’''' 5장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과학과 종교가 함께할 수 없는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대부분 종교를 잘못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 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고 한다. 종교를 믿는자에게 그가 믿는 종교가 '미신'일 수 없으며, 초자연적인 힘이라는것은 그러한 힘이 없이도 모든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종교인에게 자연현상은 종교의 교의를 참고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가 신에 대한 믿음도 아닌 이유는 신이 없는 종교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종교란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바꿀 수 없는 어떤 도덕법 체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모두 종교라는 것이다. 유대교, 힌두교 등 신이 존재하는 종교에서 도덕법 체계는 신이 창조한 것이고 불교나 도교에서는 신이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원래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일 뿐이다. 저자는 따라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힌두교 등 뿐만이 아니라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또한 하나의 종교라고 한다. 자유주의에서 믿는 보편인권사상 또한 인간이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복종해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하고 이에 대한 답을 주지만 이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지침은 종교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종교가 모두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며 과학은 사실에 대해 연구하고 종교는 가치에 대해 말하면 될 뿐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과학의 경우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종교가 사람들에게 주는 지침에는 윤리적 원칙 외에 필연적으로 사실적 주장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낙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는 '수태되고 단 하루가 지났어도 절대 낙태해서는 안 된다.' 라는 실질적 지침을 제공한다. 이러한 실질적 지침을 분석해 보면 해당지침은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라는 윤리적 판단과 '인간의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 시작한다'라는 사실적 진술이 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중 윤리적 판단은 과학이 참견할 수 없지만 사실적 진술에 대해서는 과학이 반박할 수 있다. 즉 종교가 제공하는 실질적 지침들에는 윤리적 판단과 사실적 진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적 진술은 과학의 결론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에서 과학을 떼어낼 수 없다고 한다. 흔히 근대사를 과학과 종교 사이의 투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론적으로는 종교와 과학 모두 진리를 추구하므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종교와 과학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종교와 과학 모두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현실에서 종교는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것에 있다. 다른 한편 과학은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종교인과 과학자 개개인은 진리에 관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종교와 과학은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추구한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충돌하지 않고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근대사는 과학과 인본주의라는 특정 종교 사이의 계약 과정이라고 한다. 과학은 인간에게 힘을 주었지만 반대급부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우주가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스스로 우주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새로운 교의를 발명하면서 과학이 주는 힘을 누리면서도 사회질서 붕괴라는 혼란을 피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6장 근대의 계약''' 근대 이전에는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 또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창조한 장대한 각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각본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인간의 힘을 제약하기도 했다. 근대 이전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미래의 성장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 자연시스템은 평형상태로 존재한다. 날씨에 따라 변동은 있겠지만 같은 경작지에서 생산량이 1년에 3%씩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근대 이전 사람들은 세계를 고정된 파이로 보았다. 근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것은 성장에 대한 믿음이다. 근대 이후 사회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성장이 수많은 문제의 해결법이라고 믿는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반대급부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무너트렸다. 과학은 우주에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을뿐만 아니라 계획도 목적도 없으며 우리는 우주속의 작은 점에 불과한 어느 행성에서 아주 잠깐 머물다 갈 뿐이라고 한다. 과학은 인류에게 힘을 제공했지만 존재의 의미를 박탈한 것이다. 이를 저자는 '근대의 계약'이라고 한다. 바로 '인류는 힘을 얻는 대신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7장 인본주의 혁명''' 7장에서는 인류가 [[인본주의]]를 통해 과학이 제공하는 힘을 누리면서도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근대 이전의 종교들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는 신 또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한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내적 경험이 인간의 삶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창조해낸다. 인본주의 혁명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선, 정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정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본주의는 선, 정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라고 가르친다. 인본주의 윤리의 근원은 인간의 감정이다. 인본주의에서 살인이 나쁜 것은 신이 '너희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살인이 피해자와 그 가족, 친구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본주의를 세 가지 분파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 [[사회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 – 원론적인 [[나치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서 인간은 유일무이한 독자적인 경험을 소유하는 개인이므로 각 개인이 저마다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에게 세계를 경험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고 본인의 진면목을 표현할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개인, 민족, 국가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도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최종 원천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나와 내 감정만이 아니라 타인이 어떻게 느끼고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충돌하며 생기는 갈등은 오히려 진화의 원동력이며 다툼에서 승리하는것이 더 가치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화론적 인본주의에서 전쟁은 가치있는 것이고 심지어 필수적인 것이다. 이 세 가지 분파를 구분하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든다. '''사례1''': 한 음악학 교수가 빈 오페라하우스에서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을 듣고 있다. ‘’빠바바밤!’’ 하는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그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빠바바밤!’’ '''사례2''': 1965년, 무스탕 차 한 대가 태평양 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 젊은 남성이 [[척 베리]]의 음반을 틀고 볼륨을 최대로 높인다. ‘’Go! Go! Jonny! Go!’’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그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Go! Go! Jonny! Go!’’ '''사례3''': 콩고 열대우림의 깊은 숲속에서 피그미족 사냥꾼 한 명이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다. 그는 근처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성년식 노래 합창을 듣고 있다. ‘’예 오, 오. 예 오, 에.’’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그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예 오, 오. 예 오, 에’’ '''사례4''':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캐나다 [[로키 산맥]]의 어느 곳. 늑대 한 마리가 언덕 꼭대기에 서서 발정기 암컷의 하울링을 듣고 있다. ‘’아우우우! 아우우우!’’ 음파가 그의 고막에 부딪히자 신호가 청각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고, 곧 부신이 늑대의 혈관에 [[아드레날린]]을 퍼붓는다.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목에 난 털이 곤두서고,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아우우우! 아우우우!’’ 각 사상에게 이 네 가지 사례들이 중요한 정도를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음대 교수 = 운전자 = 콩고 사냥꾼 > 늑대 인간의 경험은 모두 동등하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는 인간이 아니므로 늑대의 경험은 가치가 떨어진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음대 교수, 운전자, 콩고 사냥꾼 > 늑대 사회주의자들도 늑대의 경험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는 점에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지만 다른 세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음악의 진정한 가치는 개별 청자의 경험이 아니라 그 음악이 타인들과 사회 전체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음대 교수 > 운전자 > 콩고 사냥꾼 > 늑대 그들도 인간의 경험이 동물의 경험보다 중하다는 것은 시인한다. 그러나 인류도 진화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우생학|인간이 늑대보다 우월한 것처럼, 인간의 문화들 가운데서도 일부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수준이 높다. 인간 경험에는 분명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저자는 1914년부터 1989년까지 인본주의 세 분파 사이의 살벌한 종교전쟁이 계속되었다고 표현한다. 처음에는 자유주의가 패배하는것처럼 보였다. 공산주의 정권과 파시스트 정권이 수많은 나라들을 장악했고 나치즘이 장악한 독일은 자유주의 국가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동맹을 맺고서야 독일의 나치즘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1970년 세계에는 130개의 독립국가가 있었지만 그 중 30개 국가만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이 시기에는 자유주의 진영의 열세가 명확해 보였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보다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였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를 구원한 것은 핵무기였다고 한다. 상호확증파괴 전략이라는 방패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킬 수 있었고 이후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생산성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압도하면서 최종적으로 자유주의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이렇다 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21세기에 일어날 기술혁명은 인본주의의 근간을 흔들것이며 새로운 종교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